안녕하세요 Katy Perry입니다.
저번편에 이어서, 오늘은 시아의 음악적 커리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아는 1990년대 중반부터 시아의 가수로서의 커리어가 시작되는데 만 17세가 되던 해부터
애들레이드 지역 애시드 펑크 밴드 'Crisp'에서 보컬로 활동했다. 시아는 Crisp의 보컬로 "Word and the Deal"(1996) 와 "Delirium"(1997)의 EP 앨범에 참여했습니다.
Crisp 밴드 활동 중 시아는 솔로 앨범 계약에 성공하고 1997년 시아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데뷔 앨범 "OnlySee"를
발표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Sia'가 아닌 풀 네임인 'Sia Furler'로 발표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내에서
1000-1200장 정도 팔렸다고 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시아는 Crisp 밴드 활동을 끝내고 일본을 여행했고, 도쿄에서 지내며
호스티스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했으며, 당시 거의 망하다시피 한 데뷔 앨범 "OnlySee" 30장을 가지고 있었고,
시아는 그것을 팔기 위해 코트니 러브 스타일의 네글리제와 1940년대 스타일의 힐을 신고 어떻게든 무대
중앙에 올라 스트리퍼 폴을 잡고 서서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사인해주며 30장 모두 판매했다고 합니다.
그 후 시아의 첫사랑인 남자친구 Dan Pontifex와 함께 하기 위해 런던 행을 결정했고, 그가 있는 런던으로
가기 위해 대만에 체류하던 중 시아는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Dan이 런던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고,시아는 큰 충격에 빠져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Dan과 함께 살던 친구들이 시아를 설득해 런던으로 옮겨 살게 된다. Dan의 죽음은 시아의 인생의 큰 비극이으며, 시아는 그 후 6년 동안 약물과 술에 빠져 지내게 됩니다.
그렇게 약물과 술에 빠져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시아는 음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자미로콰이의
코러스로 무대에 섰고, Zero 7의 객원 보컬로 영입되어 활동하게 된다. Zero 7에서 활동하며 참여한 앨범은
큰 성공을 거두게됩니다.
2000-2008: 영국 활동
2010년 발표한 앨범 "We Are Born"으로 그녀는 조금씩 유명세를 얻었고, 이 앨범에 수록된 싱글 'Clap Your Hands' 등이 히트했으며, 이후 미국 아티스트들의 러브콜을 받아 많은 피처링 작업을 하게 됩니다.
조금 유명세를 얻게 되자 미국의 블로거 페레즈 힐튼은 '시아는 양성애자' 라며 시아를 아웃팅하는 블로그 포스팅을
했고 시아는 가십거리가 되었습니다. 사실 시아는 자신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끌리며, 여자와 데이트하는 사을
숨긴 적이 없었고, 전부터 여러 인터뷰를 통해 숨기지 않고 밝혀왔으며, 그런데 시아가 유명하지 않을 때엔 그것이
조금도 화제가 되지 않았으나, 아주 조금 유명세를 얻기 시작하자 가십을 통해 먹고 사는 페레즈 힐튼이나 언론의
공격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인터뷰를 보면 자신에게 쏟아지는 불편한 시선과 언론의 공격에
시아는 많은 상처를 받았으며, 굉장히 두렵고 무서운 감정이 들었다 합니다.
그렇게 앨범 "We are Born"으로 미국 활동을 하면서 이전부터 있던 우울장애가 심해지고 공황장애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미국 라이브 투어를 진행하는 동안 무대에 오르기 위해 술과 항우울제에 의존했고 그것은
곧 중독으로 이어졌고, 결국 시아는 투어를 취소해야 했고 칩거하다시피 하며 약물과 술에 의존하며 생활하게 됩니다.
2011-2012: 침체기와 작곡 활동
그럴수록 우울장애와 약물과 알콜 중독 문제는 더욱 심해졌고, 급기야 자살을 계획하는 상황에 이르고, 시아는 평소
자신과 거래하는 약물 딜러에게 엄청난 양의 약물을 주문했고, 그것을 한 번에 복용하여 자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싸구려 모텔에 머물며 자신의 시체를 발견하게 될 하우스키퍼에게 미안함과 반려견에 대한 부탁 등의 메모까지 작성했다고 합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시도 전 걸려 온 친구의 전화가 시아의 자살을 막았고, 그 후 시아는 약물과 알콜 중독을 치료하는
재활원에 입원하여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갑상선 이상 증세에 관한 치료도 병행되었고,
시아는 이후 재활에 완전히 성공했고 2016년 9월 10일에는 6년 째 술에서 깨어있는 것에 대한 감사 트윗을 올렸습니다.
호르몬 치료 등을 통해 건강을 많이 회복하며 리아나, 비욘세, 샤키라, 네요, 케이티 페리 등 여러 아티스트들의 곡을 썼
썼고, 이후로 시아는 가수로서는 은퇴를 결심하고 작곡가로만 활동할 것을 결심하고 큰 인기를 얻은
Flo Rida의 'Wild Ones'도 여러 번 거절했지만 6개월에 걸친 요청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고 발표하는 조건으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2011년, 시아와 다비드 게타가 같이 작곡했고, 다비드 게타의 4집 앨범 리드싱글인 'Titanium'이 전세계에서
10위권 내에 드는 대단한 인기를 얻으며 시아는 드디어 데뷔 15년 만에 수퍼스타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네가 날 총으로 쏜다 해도, 나는 티타늄처럼 강해서 다시 일어날 것이다'는 메시지를 담은 노래이고 원래는
케이티 페리에게 갈 곡이었지만, 'Firework'의 메시지와 너무 비슷하다는
이유로 거절했고,이후 알리샤 키스에게도 거절한 이후 R&B 아티스트 메리 J. 블라이즈가 사용하기로 하고
녹음까지 마쳤으나, 다비드 게타는 최종적으로는 가이드 보컬(가수에게 곡의 느낌을 알려주려는 목적으로
작업해서 보내는 데모 녹음) 상태였던 시아의 녹음을 그대로 공식 음원에 사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시아측에 알리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되어, 다비드 게타의 'Titanium' 음원이 나왔을 때 시아는 굉장히 불쾌(upset)했다고 밝혔습니다.다비드 게타의 말을 들어보면 실력이 대단하면서도 무명 인디
아티스트로 남아있던 시아에게 깜짝 선물 같은 것을 주려는 의도였던 것 같지만, 당시 시아는 이미 가수로서는
은퇴를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 또한 시아 입장에서는 제대로 공을 들여 완벽하게 녹음한 버전도 아니고
'곡이 이런 느낌입니다'라고 가녹음한 버전을 그대로 음원에 사용했으니 황당할 만도 하겠네요.
또한 기본적으로 시아는 EDM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은 인디 음악이라는 일종의
인디 감수성에 젖어 있었다고 했었고, 그래서 자신의 골수 팬들이 실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원래는 오직
기타 소리와 시아의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발라드 버전이었는데 다비드 게타의 작업을 통해 일렉트로닉 팝이
탄생한 것입니다. 유튜브에는 발라드 버전 'Titanium' 라이브 공연이 많이 올라와 있는데, 시아 특유의 한이 서린
폭발적인 가창력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다비드 게타와 사이가 틀어지거나 하는 문제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워낙 성공한
곡이 되었으니... 다비드 게타는 시아가 은퇴를 결심한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후에 함께 무대에 오르기도 하고 다른 곡을 함께 하기도 했고, 시아는 다비드 게타는 정말 좋은 사람이며 함께 작업하는 것이 즐겁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상 Katy Perry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편에는 시아의 2013-14년도의 음악적 활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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